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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일을 깜빡했다

 

 

 

   부탄가스에 구멍만 뚫으면 됐다. 창문도 바람 한 톨 새지 않게 꽉 틀어막았다. 현관 밑에 솜을 깔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 청테이프로 꼼꼼하게 마감까지 해 놨다. 그렇게 부탄가스에 구멍을 뚫으려는 찰나 중요한 일을 깜빡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죽기 직전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손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뭔가 아주 중요한 일이 있는데 머릿속이 백지처럼 깨끗이 비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목을 조여 오는 듯 서서히 숨이 막혀 왔다. 애써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 안을 계속 왔다 갔다 해 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청테이프와 솜들이 마구잡이로 뜯겨 나왔다.

   집을 나와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후줄근한 거리에서 넓은 대로로 넘어오자, 언덕이 있었다. 높다란 언덕 너머로 S대학교 표지판이 크게 보였다. 나는 정문 앞을 서성거리기만 할 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S대 주위를 조금 돌아봤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더 강해졌다. 대학교를 보니 가슴 언저리가 꽉 막혀 토할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제가 초행길이라서 그런데, 혹시 근처 버스 정류장이 어딘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내 팔을 붙잡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 너 병휘 아니냐?

   남자는 나를 유심히 쳐다보다 말했다. 아! 너 준서구나! 

   고등학교 동창 병휘였다. 원래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강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표준어 발음을 쓰고 있었다. 옛날에는 순박한 도시 청년의 느낌이 강했다면 그는 서울 사람이 다 돼 있었다. 병휘는 고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고는 어떻게 지냈냐, 뭐 하고 있냐 등 간단한 안부를 물어왔다. 당황해서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병휘가 대뜸 말했다.

   이야! S대 다닌다더니 여기서 다 만나네.

   가슴이 툭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왜일까? 하지만 나는 그 티를 최대한 내지 않으며 말했다.

   어, 그럼. 당연하지.

   병휘는 오늘 있을 동창회에 올 거냐고 물었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왜지? 뭔가 중요한 일과 관련 있는 건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고민하는 척 인상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살살 저었다. 아니, 안 갈 것 같은데. 그러자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갈 길을 가려고 했을 때 병휘가 나를 붙들고 말했다.

   요즘 뭐 좋은 일 있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생각하면서도 나는 최근의 내 생활을 돌아봤다. 재수 공부를 한다면서 엄마에게 학원비를 받아내 몽땅 탕진한 나. 스포츠 토토, 주식, 마지막으로 코인까지. 불경기라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사기를 당해서 그런지 내가 투자한 코인들은 전부 파란 불을 띄우며 시원하게 내려갔다. 코인 때문에 죽을 생각을 한 건가?

   복잡한 생각을 애써 지우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병휘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자기 눈에는 지금 내게 좋은 기운이 넘쳐나고 있다고 말했다. 분명히 오늘은 내게 둘도 없는 길일이 될 거라고. 방금까지 죽으려고 한 사람에게 길일이라니. 나는 병휘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커피나 한잔 마시자면서. 병휘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진지해 보였다. 얘는 지금 할 일이 없는 건가? 심심한 건가? 그래도 1년 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인데 계속 매몰차게 굴 수는 없었다. 나는 병휘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럼 음료수 한 잔 사.

   나는 병휘를 끌고 S대 안의 카페로 데려갔다. 음료수 주문을 마치자마자 카페를 한 번 둘러보더니 씩 미소를 지었다. 이야, S대는 카페도 되게 크고 좋다. 여기 학식은 어때? 병휘는 눈치도 없이 계속 학교에 대한 질문만 하고 있었다. 아, 왜 학교로 데려왔을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화제를 돌렸다. 근데 한나도 여기 합격했다고 하던데, 만났어? 고등학교 때 너희 친했었잖아.

   나는 음료수를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누군가가 목을 있는 힘껏 쥐어짜는 듯 숨이 턱 막혀 왔다. 짜증 날 정도로 화창한 푸른색의 하늘이 순간 노랗게 보였다. 목덜미가 스산해지고 머리로 피가 순식간에 몰리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중요한 일이 떠올랐다! 부탄가스에 구멍을 뚫기 전 나를 멈춰서게 했던 그 중요한 일이. 홍한나, 바로 홍한나를 막는 것이었다. 홍한나가 동창회에서 내 비밀을 까발리는 것, 바로 그 일을 막아야 했다.

 

   고등학교 때 나와 한나는 베프였다. 서로의 글을 읽고서 피드백을 해 줬고, 시험 때는 도서관에 함께 남아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3이 되고 입시에 돌입했다. 나는 A예고에서 4년 동안 한 번도 보내지 못한 S대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선생님들은 모두 나를 응원해 줬고, 반 아이들도 나를 우러러보거나 합격을 빌어줬다. 한나도 마찬가지였다.

   감염병 예방 차원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전부 가정학습을 쓰라고 했다. 나는 집에서 생기부를 달달 외웠고, 화상채팅 앱을 이용해 모의 면접을 받았다. S대 입학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자신감이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상태로 S대 면접에 갔다. 하지만 교수님들의 질문을 듣는 순간 넘쳐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 교수가 나에게 소설도 어찌 보면 거짓말인데, 거짓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해봤지만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뜬금없게도 빨간색, 하얀색, 검은색과 같은 색깔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여러 색을 가진 거짓말들’이란 문장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거짓말이란 아름다운 색을 가진 카멜레온이라고,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카멜레온? 아주 흥미로운 대답이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질문을 던진 교수님이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물었다. 

   “거짓말은 여러 가지 색을 가지고 있고, 카멜레온도 그렇습니다. 벌레들을 속이기 위해…….”

   다시 생각해 봐도 완벽한 대답이었다. 카멜레온과 거짓말의 특성을 아주 잘 엮은, 재치 있는데다 문학적이기까지 한 비유였다. 하지만 내 말이 길어질수록 교수님의 표정은 흥미를 잃은 듯 심드렁해지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네, 말을 참 잘하는군. 그럼 실제로 거짓말도 잘하나?”

   “네?”

   교수님은 그만 됐다, 고 말했다. 옆에 있던 다른 교수가 수고했다며 나가보라고 했다. 

   어딘가 싸한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꾸벅 인사를 한 뒤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불합격을 통보받은 것은 이 주 후였다. 온몸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볼을 꼬집어 봤다. 얼얼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입시 결과 발표날이었다. 부장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 준서야, 됐지? 나는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아……, 네. 그러자 환호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될 줄 알았어. 너무 장하다. 수고했어. 푹 쉬고, 언제 한번 초청 강연 부를 테니까 꼭 와줬으면 해. 나는 똑같이 네, 라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선생님께 불합격 소식을 전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시 전화를 걸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토토, 주식, 코인에 차례로 빠져 드는 동안 나는 S대 재학생으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부장 선생님이 졸업생 초청 강연으로 나를 불렀을 때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거절해버렸다.

 

   1년은 훌쩍 지나갔다. S대 앞 자취방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던 지난달 말, 단체 채팅방에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계속해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용을 확인했다. 한나가 S대를 목표로 반수에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술기운이 확 날아갔다. 그날 새벽 1시쯤, 한나에게 전화가 왔다. 준서야, 나 S대 합격했어! 수강 신청할 때 어느 교수님 강의가 더 나아? 알려줘, 알려줘. 한나는 잔뜩 술에 취해 꼬인 말투로 물어왔다. 어지간히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내 비밀이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한나가 재촉해 물었다. 야, 쪼잔하게 그러지 마알고 알려줘어라……. 나랑 가치이 수업 듣자아. 한나의 말투는 점점 꼬여 갔다. 위험하다. 만약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의심을 살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기억을 더듬었다. 입시 준비를 할 때 검색했던 S대 교수진이 떠올랐다. 나는 K 교수님의 강의도 좋지만, H 교수님의 강의가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고 뻔뻔하게 말했다. 

   그녀는 알겠다며 학교에서 볼 생각을 하니 신난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기지를 발휘해 지난 학기에 휴학을 해서 아마 만나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녀는 아쉬워하면서 그래도 꼭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한숨을 돌렸다. 한나를 다시 만난 것은 통화를 마친 지 일주일 후였다. 한나는 내가 자주 들르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너도 이 근처에 사냐며 좋아했다. 한나도 이 근처로 자취방을 구했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반갑다고 인사한 뒤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내가 켜둔 코인리딩방에서 A코인을 당장 매수하라는 메시지가 뜬 것은 잠자리에 막 들 무렵이었다. 벌써 일주일째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이제 단 몇 만원밖에 없었다. 이미 부모님께는 손을 벌려 더는 돈을 받을 수 없었고, 동생한테도 카톡 차단당한 상태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한나, 한나밖에 없었다. 다음날 오전에 바로 한나를 찾아 편의점으로 향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한나에게 나는 뒷머리를 오래 긁적이다 물었다. 혹시……,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어머니가 입원하셔서……. 빨리 갚을게. 한 번만 도와줘.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미간이 약간이지만 좁아졌다. 눈을 뜬 그녀는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더니 곧 말했다. 그래, 알겠어. 잠시 뒤, 그녀는 두둑한 현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의 겉면에 단정하게 적힌 한나의 글씨체가 보였다. <백일장 상금>. 한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백일장에서 탄 상금은 꼭 현금으로 모아 두는 타입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 바로 ATM기로 달려가 돈을 입금했다. 투자 정보방에 올라온 코인에 고민도 하지 않고 돈을 전부 투자했다. 하루 동안은 느슨한 오름세였던 코인은 다음 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닥을 치고 지하까지 추락했다.

   그 뒤로 나는 최대한 한나를 피해 다녔다. 카톡을 읽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으며 숨어 다녔다. 동네에서 한나를 마주치면 곧바로 돌아서서 멀리 도망갔다. 야! 너 나한테 거짓말 했지? 일단은 다음 주 일요일, 동창회에 나와. 그때 얘기하자. 이런 문자가 수십 통은 와 있었다. 그 이후로도 주유소부터, 배달, 상하차 알바까지 닥치는 대로 다 해 봤으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증금이 다 떨어졌다는 문자를 집주인 아주머니한테 받은 날, 나는 마침내 죽기로 결심했다.

 

   순간 떠오른 기억에 나는 벌떡 일어섰다. 동창회, 동창회가 문제였다.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는 ‘돈돈돼지 사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주에 야간 알바로 들어간 삼겹살 집 사장님이었다. 여보세요. 다급한 남자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준서야! 오늘 올 수 있겠냐? 준비해야 할 게 좀 많다. 오늘 수당은 2배로 줄게. 나는 수당 안 주셔도 됩니다, 외친 후 부리나케 고깃집으로 달려갔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동창회는 6시였다. 사장님은 나를 뒷문으로 끌고 가더니 숯을 열 테이블분만큼 빨리 만들라고 했다. 나는 사장님이 건넨 부채와 집게를 엉겁결에 받아들고 열심히 불을 지폈다. 온갖 생각들이 몰려왔다. 동창회에 누가 올까, 내가 S대생이 아니라고 말하는 홍한나를 어떻게 막아야 할까. 술을 왕창 먹일까.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불이 붙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래, 면접이 문제였다. 도대체 나는 왜 떨어졌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카멜레온이 문제였을까. 면접 시험을 보러갈 때까지만 해도 희망에 부풀었었는데. 붙었으면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고 당당하게 동창회를 즐길 수 있을 텐데. 빨간 숯이 꼭 타들어 가는 내 마음 같았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나는 기침을 해 가면서도 멈추지 않고 부채질을 했다.

   고깃집으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서 오십시오, 외치려다 멈췄다. 그들은 전부 내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사장님은 나를 부르더니 어서 테이블 안내해 드리고 밑반찬부터 가져다주라고 했다. 김치를 그릇에 담고 있을 때 홀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병휘였다.

   준서야! 동창회 안 온다며. 여기서 다 만나네. 그 말에 사장님이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속삭였다. 뭐야, 네가 동창회 여기서 하자고 한 거야? 잘했다! 넌 가서 먹어라. 일은 내가 조금 더 하지 뭐. 그는 내 엉덩이를 툭 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병휘와 동창들을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서 와. 그들은 나를 보더니 반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야! S대 학생 아니신가! 

   그들의 호들갑스러운 말에 엉성하게 호응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틈틈이 홍한나가 왔는지 살폈다. 아직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은 나를 보더니 왜 여기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카트에 밑반찬들을 담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홀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또 누가 온 모양이었다. 크게 숨을 한번 몰아쉰 후 고개를 들었다. 청바지에 밝은 회색 후드티를 입은 장신의 그녀, 홍한나였다. 그녀의 뒤로 족히 열 명은 돼 보이는 동창들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한껏 즐거워 보였다. 말했을까. 홍한나가 저들에게 내 비밀을 모두 폭로해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홀에 나와 있던 나와 슬쩍 눈이 마주친 한나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테이블에 밑반찬을 놓았다. 몇몇 아이들이 너도 앉아서 먹으라며 장난을 쳤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마저 밑반찬을 놨다. 내가 자리에 앉은 것은 동창들이 어느 정도 도착하여 테이블이 꽉 찼을 때였다.

   친구들은 서로 자기 대학교 생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웠는지 이야기가 그칠 줄 몰랐다. 나는 말을 걸어오는 동창들에게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홍한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자기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바빴다. 나는 속으로 간절히, 이대로 홍한나가 내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20명 정도 모이자 동창회는 시작됐다.

   우리 반에서 3년 동안 반장을 맡았던 성훈이가 맥주가 가득 담겨 있는 잔을 치켜들며 말했다. 지금부터 A예고 38기 문예창작과의 동창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잔을 부딪치고 마시면서 일제히 환호했다. 

   선명한 핑크빛 고기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입맛을 다셨다. 각 테이블에 고기를 구울 수 있는 사람들은 집게와 가위를 집어 들었다. 나도 집게를 들려고 했으나,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이 모두 만류했다. 에이, S대생이 고기나 자르면 쓰나.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지더니 다른 아이가 집게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 웃어댔다. 한 명이 핸드폰을 뒤적거리더니 고등학교 시절 찍었던 사진을 보여줬다. 우리는 저 사진을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토론했고, 그때마다 추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웃었다. 

   옛날에 학교 언덕 보면서 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대학교 언덕 보면서 욕할 줄 상상도 못 했다. 한 아이가 말했다. 모두 공감하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한나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때 한 아이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S대 다니고 있는 소감은 어때? 거긴 진짜 순수 엘리트 집단일 거 아니야. 에이, 엘리트는 무슨……. 그렇게 얼버무리며 나는 홍한나가 있는 곳으로 살짝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흠칫 놀라서 얼른 다시 눈을 돌렸다. 우리는 고기를 먹으며 계속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아까 본 그 시선이 신경 쓰여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성훈이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자! 우리 이렇게 모였는데, 술 게임 한번 해 봐야지. 그 말에 반응이 반반으로 갈라졌다. 무슨 술 게임이냐는 파와, 술 게임을 하자는 파였다. 성훈이는 우리의 반응을 보더니 술 게임 규칙이 적힌 종이를 하나씩 돌렸다.

   우리는 그 종이를 받아 들면서 이런 정성이라면 해 줘야 한다며 하나둘 성훈이의 말과 그가 돌린 종이에 집중했다. 기본적인 규칙은 아이엠그라운드와 비슷했지만, 거기서 몇 가지 복잡한 규칙이 추가되었다. 처음에는 몇 바퀴 돌기도 쉽지 않았지만 다들 익숙해지자 꽤 많은 릴레이가 오고 갔다. 걸린 아이들은 술을 마셨다. 동창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하지만 나는 술 게임을 이용해 홍한나의 입을 막을 방법만 궁리했다. 그녀가 뭔가 말을 하려고 하면 일부러 크게 웃고 떠들며 그녀가 술을 마시게 했다. 그녀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술을 들이켰다.

   ‘손병호 게임’ 하자. 

   한나가 선포하듯 말했다. 곧바로 게임이 시작됐다. 우리는 모두 한 손을 들고 손가락을 활짝 폈다. 몇몇 아이들이 명령어를 제시했고, 나는 그 말에 따라 손가락을 접기도 안 접기도 했다. 이미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을 한 홍한나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대학교 안 다니는 사람 접어. 

   등골이 쭈뼛 섰다. 반발하던 몇몇 재수생이 손가락을 마지못해 접었다. 나는 눈치를 보면서도 손가락을 꼿꼿이 들고 있었다. 홍한나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말했다. 야! 너 접어. 너도 대학교 안 다니잖아. 홍한나의 손가락이 가리킨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한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를 향해 꽂힌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의구심이 잔뜩 담겨 있었다. 내 심장은 이미 떨어져 있었다. 마음속은 내가 태웠던 숯보다도 더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병휘였다. 너희 다들 왜 그래. 나 오늘 S대 앞에서 준서 만났어. 학교를 훤히 꿰고 있던데? 오늘 카페에서 같이 음료수도 마셨단 말이야. 아이들은 나와 병휘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감동한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병휘를 바라봤다. 병휘의 옆모습이 왠지 든든해 보였다. 하지만 몇몇 아이들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나…… 휴학했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들의 시선이 싱겁게 흩어졌다. 나는 한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한나가 무언가 더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변명거리들을 읊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술잔에 묵묵히 술을 따랐다. 길게 이어지는 내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대충 끄덕이더니 얼른 게임이나 계속하자고 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접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나는 소설보다 사기꾼에 더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개연성이니 설득력이니 하는 것도 까놓고 보면 거짓말을 티 안 나게 만드는 법 아니겠는가. 그렇게 손병호 게임은 몇 명을 더 거치다 동창생 한 명이 바닥에 드러누운 후에야 끝을 맺었다.

   모두 술에 취해 발음이 꼬이고, 얼굴도 불그스레해졌다. 몇몇은 아예 식탁에 엎어져 잠들었다. 다들 그 모습에 하나둘씩 짐을 챙겼다. 비밀을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희열감이 차올랐다. 취기도 함께 올라와 몽롱하게 내 몸을 감쌌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정리했다. 테이블을 닦고 사용한 집기들을 카트 위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러다 홍한나가 친구와 같이 집에 들어가다가 내 비밀에 대해 불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몽롱하게 덮던 취기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끝매듭을 지어야 했다. 어떻게든 홍한나를 막아야만 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간신히 문 앞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는 그녀를 살짝 부축하며 말했다. 택시 태워줄게.

   돈이나 빨리 갚아.

   낮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한나가 말했다. 자신은 친구들과 함께 갈 거라 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완강히 거절했다.

   너 자꾸 그러면, 나……. 확, 이씨.

   위협적인 한나의 말투에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미안하다고 말을 할까, 언제까지 갚겠다고 날을 확정 지어 말할까.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지? 내가 S대생이 아닌 거? 도대체 뭘까.

   미안해.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저절로 떨려 왔다. 눈물이 찔끔 삐져나왔다. 주변의 공기가 나를 물어뜯는 듯했다. 술기운이 확 가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부러 딱 부러지게 말했다. 못 믿겠으면 말든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깃집을 빠져나왔다. 1월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나를 잘게 잘게 썰어버릴 기세로 불어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길을 걸었다. 그때 병휘가 나를 부르며 뛰어왔다. 그는 나와 걸음을 맞추며 말했다. 사실은 오늘 너 만나려고 S대 갔던 거야. 애들 사이에서 네가 S대에 합격하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한번 확인도 해볼 겸. 근데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문이었잖아. 내가 증인이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한 병휘는 내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줬다. 그의 얼굴에는 술에 취해서인지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니야. 나 사실 합격도 못 했어.”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병휘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이 귀에 걸릴 듯 웃고 있었다. 숯처럼 까무잡잡하고 갑갑했던 마음이, 바람구멍이 난 것처럼 시원하게 뚫린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아차 싶었다가도 이상하게 안도감이 썰물 밀려오듯 내 마음을 덮쳤다. 병휘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실은 너한테 다단계 가입 권유하려고 했어. 내가 요즘 많이 힘들거든. 잘 걷던 병휘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옆에 서서 병휘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울먹이는 소리와 함께 섞여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공감이 됐다. 마치 좁은 상자 안에 갇혀버린 듯 좁고 답답한 느낌, 무엇인가 나를 옥죄어 오는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병휘는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일어서더니 말했다.

   미안. 나 먼저 가볼게.

   병휘는 그렇게 나를 앞질러 갔다. 그의 등은 어딘가 구부정했고,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힘내. 병휘의 좁아진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내 집 앞 현관문에는 이상한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도둑 들겠다. 문 관리 잘해. 어딘가 익숙한 글씨체였다. 포스트잇을 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현관문의 틈을 솜과 비닐로 꼼꼼히 막고 탁상에 놓여 있던 부탄가스를 집어 들었다. 어디서 물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일러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섭씨 25도라는 글씨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보일러는 온종일 돌아가고 있었다. 아, 난방비. 망했네. TV 전원을 켰다. 켜지자마자 나온 뉴스에서는 최근 난방비가 급등했다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난방비가 이십만원이나 나왔다고 이야기하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조용히 부탄가스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뜨끈뜨끈한 반지하 방에 누워서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지만, 따뜻한 공기 때문인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완전히 눈을 감았다. 늘 불편하기만 하던 매트리스가 처음으로 편안하고 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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