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나는 새까만 개를 그렇게 불렀다.
김지훈, 「여름의 이름은.」 中
| 줄거리
‘해영‘의 이름은 원래 ‘태양’이었다. 아버지는 태양과 가깝고도 먼 거리에서 돌아가셨고, ‘태양’은 ‘해영’이 되었다. 이름 모르는 사람으로 가득한 도시. 택시 기사인 해영은 갓등의 불빛이 빨리 꺼지길 바란다. 변함없는 삶에 이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들어온다.
| 이름을 준다는 것, 이름을 받는다는 것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돌아가셨다. 여름의 일이었다. ‘의당 그래야 하는 듯’ 그의 이름은 ‘태양’에서 ‘해영’으로 바뀌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덤덤한 그의 목소리가 도입부에서부터 시선을 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태양’으로 살았다면 어떨지 가정한다. 이는 두 가지 상황을 가늠하는 것과 같다. 아버지가 부재하는 현재와 아버지가 존재하는 현재이자, ‘해영’으로 살아가는 현재와 ‘태양’으로 살아가는 현재를 말이다. 아버지가 곁에 있고 그의 이름이 태양인 후자는 그가 도달할 수 없는 가능태이다. 그렇기에 태양과 해영이라는 이름, 그리고 태양이 가장 오래 떠 있는 여름은 아버지의 죽음. 즉, 결핍이다.
이름과 여름이 연결될 때, 결핍은 해영의 주위로 확장된다. 도입부는 출근하는 해영의 동선을 따라간다. 여름 뙤약볕 아래의 풍경이 촘촘히 펼쳐진다. 빛이 있기에 색이 존재하고 사물을 구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름은 색과 경계가 뚜렷한 계절일 것이다. 그러나 열대야 속에서도 집과 도로, 도시는 무채색이다. 경계가 없다. 집 내부에는 이웃과 도심의 냄새와 먼지가, 도시에는 차들의 행렬이 뒤섞여 있다. 길게 이어지는 문장은 묘사 이상의 역할을 한다. 태양이라는 이름이 떨어져 나가면서 빛이 빠져버린 것만 같은 해영의 삶, 여전히 결핍을 안고 사는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동시에,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조명한다. "빛은 공평하다"는 문장이 말해주듯, 결핍은 공평하다. 이들은 같은 빛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이름은커녕 짧은 성도" 모른다.
그렇다면 해영은, 또 우리는 결핍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해영은 이름으로 생긴 결핍을 이름을 주는 것으로 메운다. 이름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구별된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건, 애정을 주는 일일 것이다. 그에게는 강아지 ‘31’이 그랬다. 택시 번호판을 따 31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는, 쉽게 정이 들까 봐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의도했던 것과 달리, 31은 유일하게 생동감 있는 존재가 된다. "오늘의 기대와 내일의 설렘"이 생긴다. 그는 31과 함께하는 날이 계속될 거라 여기지만, 이별은 예측할 수 없게 찾아온다.
31로 채워졌던 결핍은 31의 죽음으로 되돌아온다. 하나의 죽음이 다른 죽음을 덮을 수는 없기에, 갑절의 결핍이었다. 해영은 아버지와 31, 두 차례의 죽음을 여름 탓으로 돌린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태양에서 해영으로 바꾼 것처럼. 그러니 제목인 「여름의 이름은.」은 그의 물음일 수도 있겠다. 그 옆에 괄호를 살며시 붙여본다. 여름의 이름은 ( ). 바다 해에 항렬자 영인 해영이 차들의 행렬 속에서 매일을 보내고, 31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게 택시 번호판인 것처럼, 여름도 이름대로 결말을 맞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공백을 채우는 일은 이야기 바깥의 해영과 독자의 몫일 것이다. 어떻게 채울까. "시원찮은 단어엔 빗금, 나름 괜찮은 뜻에는 동그라미"를 치는 과정 끝에 선택될 단어가 무엇일지, 여러분의 답이 궁금하다. 결핍의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듯 각자만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설령 빈칸으로 남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