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반찬_edited.jpg

   나는 매번 지나간 계절을 그리워했다.

권예지, 「반찬」 中

   | 줄거리

   아빠의 열정이 차갑게 식었다. 엄마는 반찬을 만든 뒤 사라졌다. 몇 년이 지나서야 후줄근한 옷차림을 한 채 다시 나타난 엄마. 어디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서로를 외면하느라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이제야 꺼내 본다.

-

   | 인간은 흑도 백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단순히 선, 악과 같이 한쪽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아빠는 고작 떡볶이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붓고, 가족을 불행에 떨어뜨린 사람이다. 엄마는 어린아이의 당연한 투정에 화를 내고 집을 나갔으며, ‘나’는 아빠를 모든 일의 원흉이라 생각하며 원망한다. 그가 단순히 집안의 기둥이었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을까? 두 번째 가장이었던 엄마가 아무 말 없이 떠났을 때, ‘나’는 왜 엄마를 탓하지 않고 여전히 아빠를 원망했을까? 불행의 진짜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몰랐을 리 없다. 책임을 전가할 상대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면 회피하고 싶기 마련이니까. ‘내’가 자기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는 걸 깨달은 시점은,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기엔 이미 늦었을 때였다. 아빠는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아빠를 욕조에 밀어 넣은 사람은 누구일까. ‘나’의 잘못도 있겠지만, 이전에 아빠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은 이들의 탓도 클 것이다. 결말이 바뀔 수 있는 타이밍은 언제나 있었다.

   우리는 현실에 이런 사례가 많다는 사실을 안다. 당장 오늘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여럿 벌어졌을 수 있고, 아빠와 같은 죽음을 맞은 사람들 또한 수두룩할 것이다. 그렇지만 뉴스는 짧은 대본 몇 줄로 그들의 이야기를 끝낸다. 더 심각하고 안타까운 사건만이 여러 번 보도될 뿐이다. 이 또한 한 가정이 무너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불행에는 위계가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아빠의 죽음과 다른 이의 죽음에서 유사성을 느낄 수는 있어도, 차이점은 알지 못할 것이다. 뉴스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과 죽음들의 차이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와 엄마가, 더 나아가 이 작품을 읽은 독자만이 두 죽음의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다. 독자인 내가 주인공 ‘동아’를 따라가며 사건의 경위를 마주하고 마침내 차이점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사람’과 같은 글이었다.

D. 편지윤, 김유주, 양지수  W. 김명진, 김주희

WWW.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