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아리아」 中
| 줄거리
내가 받지 못했던 것 이상, 원구에게는 뭐든 주고 싶었다. 그건 욕심이었을까? 나는 원구가 누웠던 자리의 땅을 팠다. 그 땅에 죽은 햄스터를 묻었다.
| 상처 받은 사람을 위해
인간의 본성은 크게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이 세 가지로 나뉜다. 선한 모습에서 점점 악한 모습으로 변해 가는 주인공의 행동은 후천적인 환경이나 행위에 따라 본성이 달라진다고 주장하는 성무선악설에 가깝다. 평범함이라 말하기 어려운 폭력과 방임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은 본래 선한 본성을 지녔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을 겪으며 점점 악행을 보이게 된다. 빠르게 몰아치는 사건의 연속은 아직 막 고등학생이 된 주인공으로서는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다. 원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던 고등학생은 제 손으로 햄스터를 죽이게 되었다. 명백한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주인공이 겪은 사건 중 가장 극단적인 사건은 주변 인물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사랑했던 이를 평생 만날 수 없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두 차례의 죽음은 주인공을 점점 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물론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놀라고 슬퍼하는 모습을 악하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타인의 죽음을 마주한 주인공이 느낀 감정은 ‘악’ 자체라기보단, 주인공을 점점 극한으로 몰아가며 악행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했다. 원구의 죽음 이후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간 주인공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제힘으로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한다.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엄마와 완전히 반대되는 행보였다. 동생이 살해당하고, 그 범인은 제 아빠이며, 엄마는 자식이 벌어 오는 돈으로 보호받고 있는 현실에서, 청소년인 주인공을 정서적, 신체적으로 지켜줄 인물은 없었다. 성인도 견디기 힘든 일을 고작 청소년인 학생이 견디고 있는 셈이다. 이런 불행은 어릴 적부터 가정 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개연성으로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고, 동시에 주인공의 악행에도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사랑하는 인물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트리거로 인해 무너지는 주인공은, 독자들이 점점 악해지는 인물을 안타깝게 여기도록 만든다.
쉴 틈 없이 발생하는 사건, 희망과 불행의 연속을 통해 글은 빠른 속도감을 보인다. 힘겨운 일을 겪고 일상을 영위하는 것, 당장에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슬퍼할 겨를 없는 인물을 보며 독자는 인물이 하루빨리 시원하게 눈물을 쏟고 다시 웃으며 살아갔으면 하는, 해피엔딩을 바라게 된다. 하지만 글은 다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을 내지 않고 오히려 햄스터를 묻은 뒤 원구를 그리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끝을 맺었다. 그렇게 열린 결말로 끝난 글은 오히려 여운을 짙게 남긴다.
슬픔과 일상의 공존 속, 주인공은 엄마의 모습처럼 결핍된 감정을 지니며 살아갈 수 있고,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악한 인물로 자라날 수 있다. 또는 정반대로 상처를 극복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독자는 끊임없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며 자신만의 해석으로 글의 끝 이후를 생각한다.
‘살아감’을 단순히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던 엄마의 모습을 보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이냐며 화를 내던 주인공의 말처럼 말이다. 인생은 다소 극단적일 때가 있다. 그런 시기를 겪으며 누군가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악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타인에게 상처 입히고,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는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간다. 이 글이 악행으로 상처 받은 독자들에게 위로와 공감이 되길 바란다.
언젠가 꿈에서라도 만난다면 말하고 싶다.
이제는 따뜻함에 속아 차갑게 살고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