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을, 「구름」외 1편 中
| 줄거리
이것은 선언이 아닌 다짐이다. 시는 침묵을 비추는 가장 큰 소란. 우리는 시의 너덜거리는 넝마 사이로 침묵을 응시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 구름과 침묵은 영원히 환상 교차로를 맴돌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을 던진다면, “저마다의 이유로 구름을 떠올려” 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우리가 이 세계에 태어난 이유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이 세상에 던져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냐고.
살아간다는 것은 “행렬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환상 교차로(環狀 交叉路)에서 낙타는 “존재도 부재도 문제 삼지 않고 행렬을 계속”한다. 화자가 “삶이 단순히 시간에 불과한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에도, “한 점의 그늘을 찾아 시곗바늘처럼 서성”거리고 있음에도, 낙타는 묵묵히 걸어간다.
D.H. 로렌스의 시 「Self-Pity자기 연민」에서는 말한다. ‘나는 들짐승이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을 본 적이 없다. 얼어붙은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때도 그 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슬퍼해 본 적도 없었으리라.’ 휴머니즘을 지나 비인간과 공존하는 이 시대에, 인간만이 자기 연민을 느끼며 위로와 괴로움이라는 모순을 함께 얻곤 한다. “한 모금의 질문도 머금지 않고”,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보”기만 하는 낙타와는 다르게 말이다.
생(生), “죽음으로 길게 이어진 터널 위”에는 정해진 ‘길’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길을 잃”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서 “길 잃은 척해 본다”는 건, 어떠한 이유 없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우리가 각자만의 의미를 부여해 ‘구름’을 떠올려 본다는 것과 동일 선상일 것이다. 진실은 구름이 아닌, 그 너머 어딘가에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미련할 정도로 구름을, 자신을 놓지 못한다. 언젠가 진실과도 같은 ‘침묵’을 맞닥뜨릴 때, 우리에게 “한 점의 그늘”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건 구름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갈라진 사이로 새어 나온 “한줄기의 침묵”은 구름의 반대편에서 진입한다. 침묵이 내면을 파고들며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 이어진 행렬을 멈출 방법은 사실상 없다. 구름과 침묵은 환상 교차로를 맴돈다. 결국은 그 무엇도 생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영원히 평행을 그리며.
우리는 길 잃은 척해 본다.
죽음으로 길게 이어진 터널 위에선
길을 잃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