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3화 너무나도 밝은 태양(1)

   -!

 

   내 주먹은 꼬마의 이마에 닿아 있었다.

   피해가 없지는 않았는지 이마에서 선혈이 철철 흘러내리긴 했지만,

   본래라면 닿는 즉시 두개골째로 분쇄됐을 텐데……?

 

   설마 권의 극을 맞고 견뎌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큭?!

 

   삽시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설상가상으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알 수 있었다.

   꼬마가 내 주먹을 견뎌낸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크윽……!”

 

   몸에 찾아온 이상에 당황하는 사이,

 

   “제 선물은 마음에 드셨는지요?”

 

   위에서 교태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곳을 올려다보니 천녀가 상제 옆에 시립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그토록 싸움을 원하는 투신께 원 없이 싸울 기회를 드린 거예요. 대신 그 압도적인 강함을 빼앗아 저희에게도 공평하게 만들었을 뿐이죠.”

   “강함을…… 빼앗아?”

   “정확히 말하면 신격을 강탈했다고 할까요? 이제 당신의 육체는 일개 인간과 다를 바가 없게 되겠죠.”

 

   신격을 강탈했다?

   어처구니없는 말을 태연히 내뱉는다.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천녀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 말을 요약하면 이랬다.

 

   상제는 날 위험분자로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압도적으로 강한 내가 더욱 강해지려 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대로 놔뒀다간 같은 신들조차 어쩌지 못하는, 신을 초월한 무언가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상제의 자리를 위협받을 것 또한 필연.

 

   그래서 내가 더욱 강해지기 전에 손을 쓰기로 했다. 이건가?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게 네년이란 말이지?”

 

   하, 하하하!

   끝없이 강함을 추구한 게 그다지도 언짢았단 말인가.

   강함은 그저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이었을 뿐이거늘…….

 

   신들의 왕이라는 작자가 그 정도 포용할 그릇도 없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더불어 저희는 한 명이라도 전력이 아쉬운 상황이니…….”

 

   천녀가 손을 뻗자 쓰러져 있던 꼬마의 몸이 들썩였다.

   이윽고 상체를 일으킨 꼬마에게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꼬마도 신기했는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더니, 검을 들어 차륜을 그리듯 돌리고는 어깨에 걸쳤다.

 

   “그럼 다시 싸워볼까요, 선배님?”

 

   저 여유로운 태도.

   꼬마도 천녀와 한패였다는 건가. 그것도 모르고 내세니 제자니 하면서…….

 

   “크하하하학!”

 

   아까까지 내가 벌인 촌극에 헛웃음이 나온다.

 

   분노가 활화산보다 격하게 끓어 올랐다.

   격한 분노를 양분 삼아 일시적으로 힘을 증폭한 나는, 망설임 없이 투기를 최대로 발산했다.

   신격을 강탈했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이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투기였다. 그럼에도 이곳저곳에서 쓰러지는 신들이 속출했다.

 

   어떻게 된 건지 꼬마는 이 투기를 받고도 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오냐, 이젠 안 봐준다. 발칙한 녀석.”

 

   나와 꼬마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라졌다.

 

   검과 주먹이 부딪히려는 순간, 위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뒤통수에 싸늘한 예기가 느껴졌고,

   난 본능적으로 휘두르려던 두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우랴아!”

 

   걸걸한 기합성과 함께 무거운 일격이 팔에 떨어졌다.

   얼마나 힘이 실렸는지 허리까지 바닥에 파묻힐 정도였다.

   내 팔을 강타한 건 거대한 도끼였다.

   거대한 도끼며 이 무식한 힘과 덩치, 내가 아는 한 천상에서 단 한 명밖에 없다.

 

   “거령신……!”

   “투신께서 나 같은 잡졸의 이름을 기억해주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먼.”

   “크윽……!”

   “내 도끼를 막다니 투신께서 감이 많이 둔해지셨나?”

   거령신.

   천상대전 당시 상제군의 선봉을 맡았던 신이었다.

   웬만한 신들을 어린아이로 만드는 거구의 소유자로, 도끼질 한 번에 산을 쪼개버리는 완력을 자랑했다.

 

   거령신인 줄 알았다면 막지 않고 피했을 것이다.

 

   “내 도끼날을 뭉툭하게 만든 원한, 지금 갚겠다!”

   “그러게 주제도 모르고 덤비지 말았어야지?”

   “주제를 알아야 할 건 네놈이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도끼가 다시금 높이 들렸다.

   이에 더해 앞에서는 순백의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꼬마도 공격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이 두 강격(强擊)을 정통으로 맞으면 제아무리 나라도 치명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생사의 기로에 선 상황인데도 입가에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천상대전 이래 처음이다. 이 상태가 되었으니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다.

 

   “크하하하하하-!”

 

   내 입에서는 광소가 터져 나왔다.

   지금부터 이곳은 내 전장이었다.

 

   두 팔로 바닥을 밀어 하체를 빼내고 꼬마에게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도달하니 꼬마의 표정이 백미였다.

   그 얼빠진 얼굴에 팔꿈치를 먹여준 뒤,

   뒤로 넘어지는 꼬마의 어깻죽지를 발판 삼아 높이 도약했다.

 

   날아오른 날 향해 도끼가 육중하게 떨어져 내렸다.

 

   콰콰앙-!

 

   “이것도 못 피하다니 투신이란 이름이…….”

   “안 피한 거다.”

   “!?”

 

   바닥에 박힌 도끼가 굉음을 울리며 도로 올라왔다.

   곧이어 도끼 자루가 멋대로 움직였고, 거령신도 힘으로 버텼지만 이내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난 기합을 지르며 팔과 함께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팔이 원을 그렸고 자연히 잡고 있던 도끼는 더욱 크게 회전했다.

 

   태풍에 휘말린 인간처럼 빙빙 돌던 거령신의 입에서 필사의 절규가 터졌다.

 

   신나게 돌리다 보니 몸이 어느 정도 데워졌다.

   몸도 풀었겠다, 이제 이런 잡졸과 노닥거릴 필요는 없었다.

 

   난 도끼와 함께 거령신을 내동댕이쳤다.

   거구와 거대한 도끼의 육중한 무게로 인해 투기장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천녀여, 그 금술 제대로 건 게 틀림없는 거요?”

   “제대로 걸었사온데…….”

 

   천녀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원체 힘이 강대해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고 변명한 그녀는, 눈을 감고 기운을 모으듯 양손을 합장했다.

 

   어이가 없는 건 상제와 천녀뿐이 아니었다.

 

   힘으로만 따지면 천상에서도 손에 꼽히는 거령신이,

   오로지 힘으로 농락당한 끝에 매다 꽂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최상급 신인 나타태자나 제천대성도 감탄하고 있는데 다른 신들은 오죽하겠는가.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저자를 쳐라!”

 

   사기가 떨어진 걸 눈치챈 상제가 호령했다.

   나아가자니 투신, 물러나자니 상제. 그야말로 신들에게는 진퇴양난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도 그렇게 여유롭지는 못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슬슬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들이 정신 차릴 틈을 주면 안 된다.

 

   ‘속전속결!’

 

   괴성을 지르며 신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 뒤부터는 전투라기보다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난 한시라도 빠르게 끝내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손날, 손바닥, 주먹, 팔꿈치, 무릎, 발, 박치기.

   가끔은 천병들이 든 병장을 뺏어 내 무기로 삼기도 했다.

   수틀리면 몇몇 신의 얼굴을 움켜잡고 마구 휘둘렀다. 계속 휘두르다 보면 결국 이것들도 죽어나갔다.

   목이 꺾이거나,

   너무 어지러워 입에 거품을 물거나,

   혹은 재수 없게 같은 편의 무기에 꼬챙이가 되거나.

 

   셋 중 하나였다.

 

   당연히 신들도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개중에는 무력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신력이나 법력을 써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놈들도 있었다.

 

   물론 그놈들의 말로는 처참했다.

   신력이 내게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허나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계속 놔두면 귀찮아질 게 뻔했고, 본보기를 보여줄 심산으로 그나마 제일 가까이 있던 놈에게 눈길을 돌렸다.

 

   “히익!”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신이라고 그 새 신력으로 막을 만들었다.

   하지만 내 무자비한 철권은 방어막과 함께 갈빗대를 통째로 부쉈다.

   이렇게 되니 더 이상 원거리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악귀 같은 얼굴로 여념 없이 도륙하는 걸 반복하니, 내가 가는 곳은 저절로 길이 열렸다.

   이때를 노렸다. 상제나 천녀만 잡으면……!

 

   상제 쪽으로 몸을 돌려 발을 박차려는 순간,

   어디선가 뻗어온 붉은 비단이 뱀처럼 다리를 휘감는 바람에 중심을 잃었다.

   평소 같았으면 힘으로 다시 중심을 잡아 역으로 끌어왔을 텐데!

 

   보아하니 나타의 보패인 ‘혼천릉’ 같았다.

   최상급 보패 중 하나인 만큼 나라고 해도 쉽사리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타 이 자식, 다 된 밥에 코를 뿌리다니……!’

 

   끌려가면서도 몸을 일으켜 간신히 비단을 움켜잡는 데 성공했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나타 자식.

   이것만 풀고 나서…….

 

   투학!

 

   “크악!”

 

   불의의 일격이 턱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신격을 빼앗겨서인지 아니면 공격이 의외로 강했던 것인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무언가 가느다란 것이 신축하는 게 보였다.

 

   고개를 흔들고 다시 보니 봉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붉은색으로 얼룩진 돌기둥이었다. 돌기둥은 누군가의 양손을 오가며 춤을 추고 있었다.

   허공을 돌던 돌기둥은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지는 것으로 현란한 춤사위를 마쳤다.

 

   이어서 능글맞은 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녀의 공작이 있었다지만 너무 약해진 것 아닌가? 투신.”

   “제천대성……!”

 

   앙숙으로 이름 높은 나타와 제천대성이 협력하는 걸 다 보다니.

   내가 천상의 위업 하나를 달성해버렸군.

 

   저 둘이 합심하면 조금 귀찮은데.

 

   통천이여.

   어찌하여 하필 이럴 때 내 곁에 있지 않은 것이냐.

 

   야속하구나.

 

   너만 있었어도 진작 다 끝냈을 일을.

   숨을 길게 들이쉬어 흐트러진 호흡을 바로잡았다.

 

   지금부터가 고비였다.

 

   “내 앞을 막다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후회는 네놈이 해야지. 아무리 네놈이라고 해도 맨손으로 나와 원숭이까지 상대하긴 버거울걸?”

   “힘까지 빠지고 있는 상태에선 더더욱 말이지.”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투신에 오르고 나서는 거의 써본 적이 없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눈을 감고 손을 뻗었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기운 중 가장 큼지막한 걸 찾아 끌어당겼다.

   이윽고 무언가가 손에 착 감겨 들어왔다.

   대도였다.

   다른 한 손에는 창 자루가 잡혔다. 통천에 비해 묵직한 맛은 없었지만, 어차피 일회용이니 상관없다.

 

   “뭘 한 거지?”

   “허공섭물이라. 인간일 적에 익힌 건가?”

   “알고 있었냐? 하긴 넌 서천까지 다녀왔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군.”

 

   그 말을 끝으로 나와 둘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WWW.

bottom of page